파리 동쪽 20구. 어느 흐린 토요일 오후에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 공동묘지에 들어갔다. 입장료 없음. 입구에서 받은 지도에 유명한 무덤들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쇼팽, 발자크, 들라크루아, 모딜리아니, 오스카 와일드, 에디트 피아프, 마르셀 프루스트, 짐 모리슨. 이 사람들이 다 한 묘지 안에 있다. 44헥타르. 묘비 7만 개.
처음에는 좀 이상했다. 묘지를 관광지로 여기는 게. 한국 정서에는 잘 맞지 않는다. 그런데 한 시간 정도 걷고 나니 알겠더라. 파리 사람들이 왜 여기를 산책 코스로 쓰는지.
묘지가 아니라 도시 같다
페르 라셰즈는 도시 안의 작은 도시처럼 설계됐다. 골목이 있고, 광장이 있고, 가로수가 있다. 묘비들이 작은 집처럼 줄지어 있는데, 어떤 건 진짜 작은 예배당 크기다.
언덕을 따라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고, 봄에는 마로니에 꽃이 떨어지고, 가을에는 단풍이 든다. 동네 노인들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한다. 묘지라기보다는 19세기 파리의 한 동네 같다.
이게 페르 라셰즈의 설계 의도였다. 1804년 나폴레옹이 만들 때, "정원 같은 묘지"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영국식 풍경 정원을 모델로 했다.
페르 라셰즈는 죽은 자의 도시(necropolis)가 아니라, 산 자가 걷는 정원이다.
처음에는 인기가 없었다
페르 라셰즈가 만들어졌을 때, 사실 인기가 없었다. 너무 동쪽이고 도심에서 멀다고. 1804년에 매장된 사람이 13명뿐이었다.
당국이 마케팅을 했다. 1817년에 유명한 시인 라퐁텐과 극작가 몰리에르의 무덤을 페르 라셰즈로 옮겼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유명한 사람들이 거기 있으니 나도"라는 심리.
19세기 후반이 되자 페르 라셰즈는 파리 부르주아의 목적지가 됐다. 무덤 한 자리를 사는 게 사회적 지위의 상징이었다. 어떤 가문은 작은 신전 같은 가족 묘지를 만들었다.
지금 페르 라셰즈에 남아 있는 화려한 무덤 디자인들이 그 시대의 산물이다.
쇼팽의 무덤 앞에 항상 꽃이 있다
페르 라셰즈에서 가장 자주 방문되는 무덤 중 하나가 쇼팽의 무덤이다.
쇼팽은 폴란드 사람이지만 파리에서 살았고 파리에서 죽었다. 1849년에. 무덤 위에 슬픔의 여신상이 있고, 작은 화환과 꽃이 항상 놓여 있다. 폴란드에서 파리로 여행 온 사람들이 들고 오는 꽃이다.
쇼팽 무덤 앞에서 가만히 서서 듣는 음악이 그의 녹턴이라는 사람이 많다. 이어폰으로. 이게 좀 인상적이었다. 죽은 작곡가의 음악을 그의 무덤 앞에서 듣는다는 게.
(개인적으로는 살짝 감상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거기 서 있어 보니, 왜 그러는지 이해가 됐다.)
오스카 와일드와 키스 자국
다른 유명한 무덤이 오스카 와일드의 묘다. 큰 스핑크스 모양의 조각이 있다. 자콥 엡스타인이 만든 거.
이 묘는 한때 립스틱 자국으로 가득했다. 와일드 팬들이 와서 키스 자국을 남기는 전통이 있었다. 매년 키스 자국을 청소하느라 묘비가 손상됐고, 결국 2011년에 유리벽이 세워졌다.
지금은 유리벽 너머로 키스 자국을 본다. 유리에는 아직도 립스틱 자국이 가득하다. (관광 가이드에 적혀 있어서 그런지, 이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짐 모리슨 무덤은 항상 사람이 있다
페르 라셰즈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이는 무덤은 의외로 짐 모리슨(Jim Morrison)의 무덤이다. 미국 록 밴드 The Doors의 보컬.
1971년 파리에서 사망한 후 페르 라셰즈에 묻혔다. 그 후로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사람이 모인다. 음악을 틀어놓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술병을 들고 와서 묘 옆에서 마시는 사람도 있다.
90년대에는 이 무덤 주변이 너무 어수선해서 묘지 측이 추방을 고려한 적도 있다. 지금은 무덤 주위에 펜스가 쳐져 있다.
옆 무덤들이 좀 안쓰럽다. 짐 모리슨 옆에 묻힌 19세기 파리 시민들. 본의 아니게 매일 시끄러운 이웃을 두고 있다.
코뮈나르의 벽
페르 라셰즈에는 유명한 사람들 무덤만 있는 게 아니다. 1871년 파리 코뮌(Commune de Paris) 학살의 현장이 있다.
"코뮈나르의 벽(Mur des Fédérés)". 1871년 5월, 파리 코뮌의 마지막 저항군 147명이 이 벽 앞에서 처형됐다. 시신은 그 자리에 묻혔다. 지금은 작은 동판이 그 자리를 표시한다.
매년 5월 마지막 일요일에 좌파 정치인들과 시민들이 이 벽 앞에서 추모식을 한다. 페르 라셰즈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프랑스 정치사의 무거운 장소이기도 한 이유다.
페르 라셰즈를 걷는 방법
처음 가는 사람에게 추천하는 방법.
- 지도를 받는다 — 입구에서 무료 지도를 준다. 안 받으면 100% 길을 잃는다.
- 2~3시간 잡는다 — 한 시간으로는 부족하다. 너무 넓다.
- 흐린 날에 가는 게 분위기 있다 — 오히려 햇볕 쨍쨍한 날보다 흐린 날의 페르 라셰즈가 더 페르 라셰즈답다.
- 유명한 무덤만 보지 말 것 — 평범한 가족 묘에서도 19세기 파리가 보인다.
페르 라셰즈는 죽음을 보러 가는 곳이 아니다. 19세기 파리, 20세기 문화, 21세기 관광객의 욕망이 한 공간에 들어 있는, 묘하게 살아있는 산책로다.
파리에 다시 간다면, 한적한 오후에 페르 라셰즈를 한 번 더 걸어볼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