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구시가지(Old Quarter)의 타히엔(Tạ Hiện) 거리, 저녁 6시 30분. 도로 옆 인도에 빨간 플라스틱 의자 수백 개가 줄지어 있었다. 의자 높이가 어린이용 같은데, 다 큰 어른들이 그 위에 무릎을 90도로 접고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한 잔에 5,000동 — 한국 돈 270원. 진짜다.
옆 테이블의 베트남 청년이 잔을 들면서 "Một, hai, ba — Yo!" 하고 외쳤다. 같이 앉아 있던 친구들도 다 같이 잔을 부딪쳤다. 이게 비아 호이(bia hơi)다. 단순한 맥주가 아니라 하노이 저녁의 정체성이다.
체코 기술자가 1957년에 만든 맥주
비아 호이의 역사는 의외로 외국 기술에서 시작된다. 1957년 베트남 정부가 체코슬로바키아에 맥주 양조 기술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막 독립한 직후였고, 사회주의 형제국 체코의 기술 원조를 받았다.
체코 기술자들이 하노이에 들어와 작은 양조장을 세웠다. 이 양조장이 나중에 'Habeco(하노이 양조사)' 가 됐다. 비아 호이는 처음부터 노동자 계층을 위한 저렴한 맥주로 설계됐다.
비아 호이의 핵심은 '저장하지 않는 맥주' 다. 매일 만들어 매일 다 판다.
비아 호이는 알코올 도수가 낮다. 보통 3~4%. 체코식 라거 기법으로 만들지만, 방부제와 살균 처리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날 안에 다 마셔야 한다. 양조장에서 새벽에 만든 맥주가 트럭에 실려 거리 가게로 배달되고, 그날 저녁에 사람들이 다 마신다.
이 단순한 시스템이 60년 넘게 유지되고 있다. 매일.
왜 잔당 5천 동밖에 안 할까
비아 호이의 가격은 1잔에 5,0008,000동이다 (약 270430원). 외국 관광객이 처음 듣고 "에이 농담이지?" 라고 의심한다. 진짜 그 가격에 판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몇 가지다.
첫째, 유통이 거의 없다. 양조장 → 트럭 → 가게. 끝. 병에 담거나 라벨링하지 않는다. 큰 스테인리스 통(keg)에 담아 그대로 가져간다.
둘째, 마진이 잔당 1,000~2,000동이다. 가게가 한 잔에 1,000동 정도 남기고 판다. 적은 마진이지만 회전이 빠르다. 한 가게가 저녁에 1,000~2,000잔을 파는 건 흔하다.
셋째, 가게 자체가 단순하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 작은 알루미늄 테이블, 길거리 공간. 임대료가 거의 없거나 인도에 펴 놓는 무허가 공간이다. (참고로 단속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베트남 도시 행정은 어느 정도 눈감아 준다.)
넷째, 맥주가 단순하다. 맥아, 홉, 효모, 물. 그게 다다. 첨가물 없고, 보존 처리 없고, 라벨도 없다. 비용이 낮다.
하노이의 비아 호이 거리들
하노이에서 가장 유명한 비아 호이 거리는 단연 'Tạ Hiện(타히엔)'이다. 구시가지 한복판, 호안끼엠 호수에서 도보 5분. 저녁이 되면 길 양쪽이 빨간 의자로 가득 차서 차도 못 다닐 정도다.
다른 유명한 곳들도 있다.
- Bia Hơi Hải Xồm. 하노이 노동자들이 즐겨 가는 체인. 가게 분위기가 진짜 로컬이다.
- Lương Ngọc Quyến 거리. 타히엔 옆 골목. 좀 더 조용하다.
- Bia Hơi Cường Hói. 진짜 현지 사람들만 가는 동네 비아호이. 외국인은 거의 없다.
타히엔이 '국제 비아 호이' 거리라면 다른 곳들은 진짜 하노이 사람들의 일상 공간이다. 가격은 비슷한데 분위기가 다르다.
안주는 거의 정해져 있다
비아 호이 가게에서 시키는 안주는 거의 표준화되어 있다. 가장 흔한 게 '낌카리(Nem chua rán)' — 베트남식 발효 소시지 튀김. 노릇하게 튀긴 작은 소시지가 5~6개 나온다. 잔당 매콤한 칠리 소스에 찍어 먹는다.
그 외에 '도뉴엉(Đậu nướng)' 두부 구이, '꼬이뇨(Cá nướng)' 작은 생선 구이, '람부오이(Lạc rang muối)' 소금 땅콩 볶음. 다 가벼운 안주들이다. 비싼 메뉴를 안 시켜도 눈치가 안 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은 건 'Phở cuốn(생춘권 변형)' 이었다. 라이스페이퍼에 쇠고기와 양상추, 허브를 말아 새콤달콤한 소스에 찍어 먹는다. 비아 호이랑 진짜 잘 맞는다.)
의자가 왜 그렇게 작을까
처음 비아 호이 가게에 가면 가장 황당한 게 의자다. 어린이용 같은 25~30cm 높이. 다 큰 사람이 무릎을 90도로 접고 앉아야 한다. 왜 이렇게 작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인도 공간 효율. 좁은 인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앉히려면 의자가 작아야 한다.
둘째, 단속 시 빠른 철수. 의자를 한 손으로 들어 옮길 수 있어야 한다. 단속이 오면 1분 안에 다 치울 수 있어야 한다.
셋째,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하는 문화. 베트남 사람들은 친구끼리 가까이 앉는 걸 좋아한다. 작은 의자에 빽빽이 앉으면 자연스럽게 거리가 가까워진다.
이 작은 의자가 비아 호이 문화의 상징이 됐다. 인스타그램에 '#bia hoi'를 검색하면 빨간 의자 사진이 천 개씩 나온다.
외국인이 잘 모르는 매너
비아 호이에서 통하는 작은 매너가 있다.
- 건배할 때 'Một, hai, ba — Yo!' (하나, 둘, 셋, 야!). 베트남 친구들과 마실 때 같이 외치면 분위기가 달라진다.
- 잔을 다른 사람보다 살짝 낮게. 윗사람과 건배할 때는 잔 위치를 약간 낮춰서 부딪치는 게 매너다.
- 자리 비우면 잔에 동전을 올려둔다. "잠깐 자리 비웠다가 돌아올게" 라는 신호. 가게 주인이 치우지 않는다.
- 현금만 받는 곳이 많다. 카드는 거의 안 된다. 작은 동(VND) 지폐를 미리 준비하자.
사라지는 풍경?
근래 하노이에서 비아 호이 가게가 줄고 있다. 인도 점거 단속이 강해졌고, 임대료가 올라서 작은 가게가 견디기 힘들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가 '크래프트 비어' 같은 새로운 맥주 문화에 빠지고 있다.
그래도 타히엔이나 떠이호(Tây Hồ) 같은 핫한 동네에서는 여전히 매일 저녁 빨간 의자가 가득 찬다. 60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동네에서 사람들이 이 풍경을 만들어 왔다.
하노이에 갈 일이 있다면 호텔 식당 말고 저녁 7시쯤 타히엔에 가서 빨간 의자에 앉아봤으면 좋겠다. 5천 동짜리 맥주 한 잔, 옆 사람과 어색한 영어로 인사 한 번. 그게 하노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될 가능성이 크다. 풍경이 너무 빨리 변하기 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