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처음 갔던 날, 친구가 "베를린 음식 추천해주세요" 했더니 가이드가 "커리부어스트(Currywurst)요"라고 했다. 뭔가 좀 김빠지는 추천이었다. 길거리 핫도그 같은 거였다.
3유로짜리 커리부어스트를 받아 들고 종이접시에 놓고 먹었다. 잘게 썬 소시지 위에 빨간 토마토 소스, 노란 카레 가루. 옆에 작은 빵이나 감자튀김. 그게 다였다.
그런데 이 음식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베를린에 갈 때마다 한 번씩은 먹게 된다. 단순한 음식인데 베를린이라는 도시가 통째로 들어 있다.
1949년 9월, 폐허의 베를린에서
커리부어스트가 처음 만들어진 게 1949년 9월 4일이다.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Charlottenburg) 지역의 작은 노점.
만든 사람은 헤르타 호이베르(Herta Heuwer)라는 여성. 당시 30대 후반. 그녀의 작은 매점이 길모퉁이에 있었다.
1949년 베를린은 폐허였다. 전쟁이 끝난 지 4년. 도시 절반이 부서져 있었다. 식량 배급도 어려웠다. 헤르타도 매점을 운영하긴 했지만 팔 게 별로 없었다.
그녀는 영국군 군인들에게서 카레 가루와 우스터 소스를 구했다. (베를린 서쪽은 미국, 영국, 프랑스 분할 점령 지역이었다.) 토마토 페이스트도 구했다. 이걸 섞어서 "커리 케첩"을 만들었다.
거기에 구운 소시지를 잘라 올렸다. 하나에 1마르크.
1949년 가을, 폐허의 베를린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을 수 있던 따뜻한 음식.
1959년 특허까지 받았다
헤르타 호이베르는 1959년에 자기 소스 레시피를 특허로 등록했다. "Chillup"이라는 이름으로. (Chili + Ketchup의 합성어.)
당시 그녀의 매점은 베를린에서 인기였다. 매일 만 개 가까운 커리부어스트를 팔았다는 기록이 있다. 매점 주위로 늘 줄이 서 있었다.
흥미로운 건 그녀가 끝까지 정확한 레시피를 공개하지 않았다는 거다. 죽기 전까지 비밀로 했다. 1999년 사망. 그래서 진짜 헤르타 호이베르 레시피는 지금도 미지의 영역이다.
샤를로텐부르크 카이저-프리드리히-슈트라세 59번지에 그녀를 기리는 명판이 있다. 작은 동판에 "여기서 1949년 커리부어스트가 발명되었다"라고 쓰여 있다.
동베를린의 다른 커리부어스트
서베를린에서 커리부어스트가 만들어진 후, 동베를린에서도 비슷한 음식이 나왔다. 그런데 좀 다르다.
동베를린 커리부어스트는 "오네 다름(ohne Darm)" — 껍질 없는 소시지를 쓴다. 동독 시기에 좋은 소시지 껍질을 구하기 어려워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부드러운 소시지, 약간 다른 식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에도 이 차이는 남았다. 베를린 미테(Mitte) 지역의 커리부어스트는 약간 동독 스타일이고, 샤를로텐부르크 쪽은 서독 스타일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스타일을 다 먹어보는 게 좋다. 정말 살짝 다르지만 그 살짝의 차이가 베를린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어디서 먹어야 하는가
베를린에는 커리부어스트 가게(Curry-Imbiss)가 수백 개 있다. 그중 유명한 곳들.
커리 36(Curry 36) — 크로이츠베르크 지하철역 근처. 24시간. 새벽에 클럽 갔다가 가는 사람들이 많다. 양도 많고 가격도 합리적.
비텔 헤를리츠(Konnopke's Imbiss) — 1930년대부터 있던 동베를린 정통. 프렌츨라우어 베르크. 동독 스타일 오네 다름이 특기.
커리부어스트 무제움 옆 가게 — 박물관 옆에 있는 작은 매점. 정통 레시피 재현이라고 한다.
버거마이스터 옆 길거리 매점 — 슐레지셰스 토르 지하철역 근처. 클럽 동네라서 늦게까지 운영.
가격은 어디든 비슷하다. 한 접시에 35유로. 감자튀김 추가하면 12유로 더.
박물관까지 있다
베를린에는 커리부어스트 박물관(Currywurst Museum)이 있었다. 한때. 2009년에 열고 2018년에 폐관했다.
박물관 안에 헤르타 호이베르의 매점 재현, 1950년대 베를린 거리 풍경, 커리부어스트 만드는 과정 등이 전시됐다. 입장료에 커리부어스트 한 접시가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은 폐관됐지만 베를린 시민들에게 이 박물관이 한때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인상적이다. 커리부어스트가 그저 길거리 음식이 아니라, 베를린 정체성의 일부라는 거.
실제로 먹어보면 의외로 평범하다
솔직히 말하면 커리부어스트 자체는 그렇게 복잡한 맛이 아니다. 토마토 소스에 카레 가루를 뿌린 거. 소시지는 평범한 독일 소시지. 빵이나 감자튀김이 같이 나온다.
처음 먹으면 "이게 그렇게 유명한 거?" 싶다. 실제로 미슐랭 레스토랑 같은 깊이는 없다.
그런데 한두 번 먹어보면, 이 음식이 왜 베를린에서 안 사라지는지 알게 된다. 빠르고, 싸고, 따뜻하고, 만족스럽다. 새벽 3시에 클럽에서 나와도 먹을 수 있고, 오후 2시에 박물관 가는 길에도 먹을 수 있다. 그게 베를린식 음식 철학이다.
베를린의 정체
커리부어스트는 베를린의 자기 모순을 잘 보여준다. 폐허에서 만들어진 음식이지만 화려하다. 길거리 음식이지만 박물관까지 있었다. 단순한 패스트푸드지만 75년 동안 살아남았다.
이게 베를린이다. 부서졌다가 다시 일어선 도시. 가난했지만 자기 식대로 풍요로워진 도시. 럭셔리하지 않지만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가진 도시.
베를린에 다시 간다면 첫 날 점심으로 커리부어스트 한 접시. 그게 이 도시를 다시 만나는 방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