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드리드에서 첫날 저녁 7시 30분, 호텔 근처 식당을 찾아 들어갔다. 거의 비어 있었다. 주문하니까 종업원이 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식사하실 건가요?" 하고 다시 물었다.
밥을 먹고 나오는데 8시 30분이었다. 그때부터 식당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그날 알았다. 내가 너무 일찍 갔다는 걸.
스페인 시계는 한 시간 빠르다
스페인이 늦게 자고 늦게 먹는다는 인식은 사실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정확히는 시계가 한 시간 빠르게 맞춰져 있다.
스페인은 지리적으로는 영국과 같은 서경 0도 근처에 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GMT(영국 시간대)를 써야 맞다. 그런데 1940년 프랑코 정권이 독일과 시간대를 맞추려고 GMT+1로 바꿨다. 그 이후로 한 번도 안 돌아왔다.
그러니까 스페인의 밤 9시는 자연 시간으로 밤 8시다. 영국 사람이 저녁 8시에 먹는 거랑 비슷하다. 다만 시계가 9시라고 표시할 뿐이다.
스페인은 늦게 먹는 게 아니라, 시계가 한 시간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다.
이걸 알고 나면 모든 게 이해된다. 점심 2시 반, 저녁 9시 반, 잠 1시 — 다 한 시간씩 빼면 영국이나 한국이랑 비슷하다.
시에스타가 만든 저녁
물론 시간대 문제만으로 늦은 저녁이 다 설명되진 않는다. 점심 문화도 큰 역할을 한다.
스페인 점심은 보통 오후 2시~3시 30분 사이다. 이게 하루의 메인 식사다. 전채(entrante), 본식(plato principal), 후식(postre), 커피까지 풀 코스. 1시간 넘게 먹는 경우가 흔하다.
이렇게 푸짐하게 먹고 나면 저녁이 일찍 고플 리가 없다. 게다가 옛날에는 점심 후 시에스타 — 낮잠 시간이 있었다. 더운 오후를 피해서 12시간 쉬고, 다시 일하다가 8시쯤 퇴근, 그러면 저녁은 자연히 910시.
지금 도시에서는 시에스타가 사라지는 추세다. 그래도 점심을 길게 먹는 습관은 남아 있다. 그래서 저녁 시간도 그대로다.
메리엔다 — 점심과 저녁 사이의 간식
오후 5~6시쯤 카페에 가보면 사람들이 작은 빵이나 케이크와 커피를 먹고 있다. 이걸 메리엔다(merienda)라고 한다.
점심 2시반, 저녁 9시반 — 그 사이가 너무 길다 보니까 중간에 가벼운 간식을 먹는 문화가 자리 잡았다. 어른들도 먹지만, 특히 학교 끝난 아이들이 메리엔다를 먹는다.
추로스 한 두 개에 핫초콜릿, 치즈 한 조각이 들어간 작은 빵, 이런 것들. 한국으로 치면 4시쯤 먹는 떡볶이 같은 포지션이다.
식당의 두 번의 영업 시간
스페인 식당은 보통 두 번 영업한다. 점심 영업이 1시쯤 시작해서 4시쯤 닫고, 저녁 영업이 8시 30분쯤 다시 열어서 자정쯤까지 한다.
그 사이 5~8시 사이에는 식당이 문을 닫는다. 직원들이 쉬는 시간이다. 관광객들이 이 시간에 헤매다가 결국 맥도날드를 가는 일이 흔하다.
(참고로 관광지의 일부 식당들은 외국인을 위해 6시부터 영업하기도 한다. 그런 곳은 보통 음식이 별로 좋지 않다. 진짜 스페인 식당을 가고 싶으면 9시는 돼야 한다.)
외국인이 적응하는 법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을 보낸다면 며칠은 시차에 맞추는 데 쓰인다. 가장 큰 적응 포인트:
- 점심을 든든하게 먹기 (안 먹으면 6시에 배고프다)
- 5시쯤 메리엔다로 버티기
- 저녁은 9시 이후로 미루기
- 자정에 자는 게 정상이라고 받아들이기
처음에는 8시에 배고파서 미칠 것 같다. 사흘쯤 지나면 신기하게 적응된다. 한국 시간으로 새벽 4시에 잠드는 셈이지만, 그게 스페인의 자연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또 그럴 만하다.
스페인 사람들이 늦게 먹는 게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들의 햇빛과 시계가 어긋나 있어서다. 그리고 솔직히, 9시 반에 식당 가서 맥주 한 잔으로 시작하는 저녁이 7시에 마감되는 저녁보다 훨씬 즐겁다. 한 번 그 리듬에 들어가 보면 한국으로 돌아와서 저녁 6시에 식당 들어가는 게 좀 어색해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