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차로 1시간. 박닌성(Bắc Ninh)의 동호(Đông Hồ) 마을에 도착했다. 작은 시골 마을. 논과 연못, 야자수 그리고 오래된 기와집들.
마을 끝에 작업장이 하나 있다. 70대 정도 되어 보이는 응우옌(Nguyễn) 아저씨가 종이 위에 나무 판으로 그림을 찍고 있었다. 빨강, 노랑, 초록의 단순한 색깔. 그 위에 검은 윤곽선. 그림 안에는 닭 한 마리, 돼지 한 마리, 또는 아이를 안은 어머니.
이 그림이 동호 민화(tranh Đông Hồ)다. 17세기부터 이 마을에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베트남 민속화.
동호 민화는 정월 그림이었다
동호 민화의 원래 용도가 정월에 있다. 베트남 음력 새해 뗏(Tết) 명절에 집 안에 붙이는 그림이었다.
베트남 시골 사람들은 새해가 오면 동호 민화를 한 장씩 사서 집에 붙였다. 어떤 그림을 붙이는지가 그 해의 소망을 보여줬다.
- 닭 그림 — 부지런함, 가족의 풍요
- 돼지 그림 — 풍년, 풍요
- 아이를 안은 어머니 — 자녀의 건강과 출산
- 잉어 그림 — 학업 성취 (잉어가 용이 된다는 전설)
- 결혼식 풍경 — 결혼할 자녀가 있는 집
- 수확 풍경 — 농사 풍년
값이 비싸지 않았다. 한 장에 쌀 한 컵 정도. 그래서 가난한 시골 사람들도 살 수 있었다. 새해마다 가족 모두의 소망을 그림으로 한 장씩 사는 게 베트남 시골의 풍습이었다.
동호 민화 한 장은 베트남 시골 가족의 한 해 소망이었다.
어떻게 만드나
동호 민화 만드는 과정이 흥미롭다. 다른 어느 나라 민속화와도 다르다.
1. 종이 만들기 조이 즈(giấy dó)라는 특별한 종이를 쓴다. 도(dó) 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이 종이 위에 굴 껍질을 갈아 만든 흰 가루를 발라서 표면을 만든다. 살짝 펄이 도는 표면이 된다.
2. 색깔 만들기 모든 색이 자연 재료에서 나온다.
- 빨강 — 시앙리에우(siêng liệu) 돌가루
- 노랑 — 회화나무 꽃에서 추출
- 초록 — 쪽 식물(indigo) + 노랑
- 검정 — 대나무 잎을 태운 재
- 흰색 — 굴 껍질 가루
지금도 동호 마을 작업장에서 이 색깔들을 직접 만든다. 화학 물감을 안 쓴다.
3. 나무 판으로 찍기 색깔별로 나무 판이 따로 있다. 한 그림에 보통 4~5개 나무 판. 한 가지 색씩 차례대로 찍는다. 마지막에 검은 윤곽선을 찍어서 완성.
이 모든 과정이 손작업이다. 한 그림 만드는 데 두 명이 종일 일해서 50~100장 정도.
가장 유명한 그림들
동호 민화 중에 가장 유명한 그림이 몇 개 있다.
닭 가족(Gà đàn) — 어미 닭이 병아리들을 거느린 그림. 가족의 풍요를 상징.
돼지 가족(Lợn đàn) — 어미 돼지와 새끼 돼지들. 풍년의 상징.
잉어 두 마리(Cá chép) — 잉어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는 모습. 출세, 학업 성취.
아이가 잉어를 안고 있는 그림(Em bé ôm cá) — 자녀의 건강과 풍요.
남녀 인사(Lễ trí) — 결혼하는 부부가 부모에게 인사하는 모습.
이 그림들이 다 단순한 색감과 단순한 구성. 그런데 묘하게 인상적이다. 모던 아트 같은 디자인이다.
마을이 거의 사라졌다
동호 민화의 흥미로운 점은 만드는 마을이 거의 사라졌다는 거다.
20세기 초까지 동호 마을의 거의 모든 가구가 동호 민화를 만들었다. 17개 가문이 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동호 민화 수요가 급격히 줄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새해에 동호 민화를 안 사고 인쇄된 포스터를 사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마을의 작업장이 거의 다 문을 닫았다.
지금 동호 마을에서 진짜 동호 민화를 만드는 가구는 두 가구 정도 남았다. 그중 하나가 응우옌 후 삼(Nguyễn Hữu Sam) 가문이다. 8대째 같은 일을 한다.
(개인적으로는 작업장에서 본 그 노인의 손이 잊히지 않는다. 60년 넘게 같은 동작으로 종이에 색을 찍은 손.)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2013년 동호 민화는 베트남 정부 차원에서 보호 대상이 됐다. 2024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재 등재가 신청됐다.
하노이 박물관에 동호 민화 전시실이 있다. 일부 갤러리에서도 진본을 살 수 있다. 작은 그림 한 장에 50~100달러. 큰 작품은 더 비싸다.
(인쇄본이 아닌 진짜 동호 민화는 종이 질감, 색깔의 깊이, 윤곽선의 떨림이 다르다. 한 번 진본을 보면 인쇄본과 구별된다.)
가는 방법
하노이에서 동호 마을까지 차로 1시간. 박닌성 투안탄(Thuận Thành) 군에 있다.
대중교통으로 가긴 어렵다. 호이안이나 한국에서 드라이버가 있는 차를 구하는 게 보통이다. 하루 패키지로 100달러 정도.
가서 보면 정말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큰 박물관도 없고, 화려한 표지판도 없다. 작은 작업장 한두 개. 그런데 거기서 400년 전과 같은 방식으로 그림이 만들어지고 있다.
한 장의 종이가 보여주는 것
동호 민화 한 장을 사서 한국에 가져왔다. 닭 가족 그림. 거실에 작은 액자에 넣어 걸어뒀다.
화려한 그림은 아니다. 그런데 묘하게 따뜻하다. 17세기 베트남 시골 가족이 새해에 같은 그림을 보면서 가졌던 그 소망이 이 종이 한 장에 들어 있다. 시간이 묘하게 압축되어 있는 그림이다.
다음에 베트남에 가게 되면, 하노이만 보지 말고 동호 마을에 하루 들르고 싶다. 응우옌 아저씨가 아직 작업장에 있는지 보고 싶다. 그가 종이에 색을 찍는 손을 한 번 더 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