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탄 시장 앞 사거리에 처음 섰을 때, 솔직히 그 자리에서 도로 건너는 걸 포기할 뻔했다. 신호등이 있긴 한데 다들 지키지 않는 것 같았고, 오토바이가 양쪽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이 사이를 걸어 건너지?
옆에 서 있던 베트남 아저씨가 나를 보고 손짓을 했다. "그냥 천천히 걸어. 멈추지 말고." 반신반의하면서 그를 따라 걸어가니 신기하게 오토바이들이 알아서 비켜 갔다. 이게 호치민 도로의 첫 수업이었다.
베트남 오토바이 통계가 사람을 압도한다
2024년 기준 베트남 등록 오토바이는 약 7700만 대. 인구가 1억이라는 걸 감안하면 거의 전 국민이 한 대씩 가지고 있는 셈이다.
호치민시(인구 900만)에는 약 750만 대의 오토바이가 등록돼 있다. 매일 출퇴근 시간 도로에 쏟아지는 오토바이만 수백만 대다. 자동차도 있긴 한데, 비율로는 압도적으로 오토바이가 많다.
이런 환경에서 도시의 교통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이 한국이나 일본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신호등도 있고 차선도 있는데, 그게 절대적인 규칙이 아니라 참고 사항에 가깝다.
호치민 도로는 카오스가 아니라 다른 종류의 질서다. 그걸 모르면 카오스로 보인다.
"멈추지 말고 걸어"의 비밀
오토바이가 흐르는 사이로 사람이 도로를 건너는 광경은 외국인에게 충격이다. 그런데 거기엔 명확한 논리가 있다.
오토바이 운전자는 보행자가 다음에 어디로 갈지 예측해서 피해 간다. 보행자가 일정 속도로 직선으로 걸으면, 운전자가 그 동선을 계산해서 앞이나 뒤로 비켜 간다.
문제는 보행자가 갑자기 멈추거나 뒤돌아가는 경우다. 그러면 운전자의 예측이 빗나가서 사고가 난다. "멈추지 말고 일정한 속도로 걸어"가 핵심 룰인 이유다.
(참고로 처음에는 무서워서 발이 안 떨어진다. 호치민 사람들이 자주 쓰는 표현이 있다. "Just walk like the motorbikes don't exist." 오토바이가 없는 듯이 걸어. 진심이다.)
오토바이의 신비한 다용도
호치민 거리에서 가장 많이 본 광경 중 하나가 오토바이의 다용도 사용이다.
- 4인 가족이 한 오토바이에 (아빠, 엄마, 아이 둘)
- 거대한 가구를 묶고 가는 오토바이
- 닭이 든 박스를 100개 쌓아서 가는 오토바이
- TV, 냉장고를 묶어 가는 오토바이
- 길이 3미터의 사다리를 가로로 걸친 오토바이
이게 다 일상이다. 오토바이가 단순한 교통수단이 아니라 트럭, 택시, 가구 운반차의 역할을 다 한다. 한 대로 모든 걸 처리한다.
이 다용도가 베트남 도시 경제의 효율성을 높인다. 자동차로 했을 때 필요한 인프라(주차장, 넓은 도로, 주유소)를 다 줄일 수 있다.
그랩 바이크가 바꾼 도시
2014년 그랩(Grab)이 베트남에 들어왔을 때, 가장 빠르게 자리 잡은 게 그랩 바이크 — 오토바이 호출 서비스 — 다.
스마트폰으로 그랩을 호출하면 5분 안에 오토바이가 온다. 헬멧 빌려주고, 뒤에 타고, 목적지까지 간다. 가격은 택시의 절반 이하. 거리에서 그랩 기사들의 초록색 자켓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이게 호치민 도시 흐름을 바꿨다. 외국인 관광객도 그랩 바이크를 쓰면 도시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고, 현지인도 본인 오토바이가 없어도 같은 편의를 누릴 수 있게 됐다.
(참고로 처음 그랩 바이크 타면 약간 무섭다. 운전자 등 뒤에 거의 매달려서 시속 50km로 차들 사이를 빠져나가는 경험이다. 한 번 익숙해지면 가장 빠른 호치민 이동 수단이다.)
외국인이 도로 건너는 5단계
호치민에서 일주일을 보내면 도로 건너는 게 익숙해진다. 단계별 적응:
- 첫 시도 — 횡단보도 앞에서 5분 동안 못 건넌다
- 현지인 따라가기 — 옆에 서 있는 베트남 사람이 건널 때 같이 건넌다
- 그룹으로 건너기 — 여러 명이 함께 건너면 운전자가 더 잘 인식한다
- 혼자 시도 — 천천히, 일정한 속도로, 멈추지 않고
- 현지인 마인드 — 오토바이 사이로 자연스럽게 걷는다
가장 중요한 건 시선이다. 운전자와 눈을 마주치면 그가 당신을 인식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마주치면 운전자가 당신이 멈출 거라고 오해한다. 짧게 인식 신호를 보내고, 계속 걸어가는 게 핵심.
안전과 위험의 균형
이렇게 흐르는 시스템이 효율적이긴 한데, 사고도 많다. 베트남 교통사고 사망자는 연간 약 7천 명. 인구 대비 한국의 1.5배 정도다.
대부분 오토바이 사고고, 헬멧 미착용이 큰 원인이었다. 2007년 헬멧 의무화 법이 시행된 뒤 사망률이 줄었지만, 여전히 높다.
외국인 관광객도 사고 위험이 있다. 그랩 바이크를 자주 타거나 직접 오토바이를 빌려 타다가 다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베트남에서 오토바이 운전을 시도할 거라면 국제 운전면허(오토바이 카테고리), 헬멧, 장갑은 필수다.
한국에서는 절대 못 보는 풍경
호치민에서 가장 인상적인 풍경 중 하나는 출퇴근 시간 사거리다. 신호가 빨강으로 바뀌면 오토바이 수백 대가 첫 줄에 모인다. 신호가 바뀌는 순간 한꺼번에 출발한다.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곤충 떼처럼.
이걸 보면서 도시가 작동하는 방식이 정말 다양하다는 걸 새삼 느낀다. 한국 도시는 자동차 중심으로 설계됐고, 그래서 도시의 풍경도 그렇게 생겼다. 베트남은 오토바이 중심으로 설계됐고, 그래서 도시 풍경이 완전히 다르다.
다음 베트남에 가면 호치민 출퇴근 시간 사거리에 한 번 서서 그 흐름을 구경해보길. 무섭지만 매혹적이다. 그게 베트남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익숙해지면, 한국 돌아와서 신호등 잘 지키는 거리가 좀 답답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